과학인으로서의 단상
Date 2018-04-16 19:43:39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864
성창민
선임연구원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콘트롤센터
scm@kist.re.kr

프롤로그


지난 달, 평창올림픽 도핑분석 업무로 바쁜 와중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랜만에 연락 온 선배로부터 ‘젊은BT인’의 원고를 부탁 받지만, 평소 작문의 습관이 없는 나에겐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일반인들이 들어도 알만한 유명 저널에 논문을 쓰지도, 최근 학계에 핫한 분야도 아닐뿐더러, 이제 연구소 생활한지 2년여 남짓, 한없이 부족한 나에게 원고를 부탁한 이유도 모르는 통에 그저 부담스럽다며 거절해보려 했지만, BT인으로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일기 쓰듯 적어내면 된다는 조언만이 되돌아왔고, 그저 오랜만인 선배 목소리에 대한 반가움에 덜컥 수락하고 말았다. 자전적인 이야기라... 누군가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조연 혹은 마이너리즘(?)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부터 타고난 과학 영재라던가, 소위 내로라 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수재와는 전혀 딴판으로, 그저 고만고만한 수능성적과 집안 사정으로 지방 국립대를 진학해 뒤늦게 생명공학에 흥미를 붙였고 전공을 살려 공부해 보겠다며 대학원을 선택, 박사학위를 받은 조금은 평범한 과학도 이야기가 되겠다. 그저 지금까지 뛰어난 연구업적으로 내로라하는 저널에 논문을 투고한 적도, 대형과제를 수행한 경험도 없거니와, 말만하면 누구나 다 아는 분야에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학위과정 중 졸업한 선배나 교수님 앞으로 배송되어 몰래 뜯어 보던 생물공학회지에 내 이야기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는 게 살짝 낯부끄럽기도 하다.
조금 더 회상해 보자면, 전남대학교 생명과학기술학부 생명공학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던 10년 전, 시기상으로 의학, 치의학, 약학 전문대학원이 졸업 후 진로로 가장 유행했던 때(생명관련 과 학생들 중 90% 이상이 전문대학원을 진학하거나, 진학 희망했으니 감히 유행이라고 하겠다.)에, 분자유전학 실험실에서 2년 여 생활했던 추억을 바탕 삼아 전공을 살리겠다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었고, 분자생물공학 및 신소재개발연구실에서 미생물 대사공학 테마로 재작년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정작 학위과정 중 가장 많은 시간을 실험실 메인 테마인 효소공학(enzyme engineering)이나 대사공학(metabolic engineering)이 아닌 질량분석기(mass spectrometry)와 함께 했으니, 그 간 어느 바탕에서나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선택들을 해왔다는 게 타고난 성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혹은 운이 좋게도)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하시는 교수님 혹은 박사님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꽤 수준 높은 질량분석기를 이용한 실험적 경험과 데이터 해석을 할 수 있었고, 이를 정리하여 투고했던 논문 실적들은 결과론적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도핑콘트롤센터에 입원하게 되는 데 큰 자산이 되었으니, 내 태생적 선택에 그저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매사에 노력해 왔음은 자명한 일이다.

 

 

KIST 도핑콘트롤센터


잠깐, 내가 연구 및 업무를 하는 이곳 도핑콘트롤센터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1984년 KIST에 설립된 이래로, 서울아시안게임(1986년), 서울올림픽(1988년), 대구육상대회(2011년), 인천아시안게임(2014년), 평창동계올림픽 & 패럴림픽(2018년) 등의 국내외 대회의 도핑분석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며, ISO17025 국제표준에 따른 한국인정기구(Korea Laboratory Accreditation Scheme, KOLAS)의 시험인증과 세계반도핑기구(World Anti-Doping Agency, WADA)의 국제시험표준(International Standard for Laboratories, ISL)에 따른 공인 시험실 인증을 바탕으로 국내 유일의 반도핑 시료 분석 시험실이다. 이곳에서 연구원으로써 하는 주된 업무로는 매년 갱신되는 도핑 금지 물질에 대한 신규분석법을 추가하거나, 기존 분석법을 보완 및 갱신시키고 있으며, 연 평균 5000여 개의 소변 및 혈액시료에 대한 도핑분석과 더불어 연 3회 WADA 주관의 외부품질평가시험(External quality Assessment Scheme, EQAS)과 일반 시료와 섞여 들어오는 수 차례의 이중맹검시험(Double-Blind test)을 수행하고 있다. 주된 연구 분야로는 액체-크로마토그래피(Liquid chromatography) 및 기체-크로마토그래피(Gas chromatography)와 연결된 질량분석기를 활용한 신규 금지물질에 대한 분석법 개발과 인슐린이나 인간성장호르몬(human Growth Hormone), 적혈구생성 단백질(Erythropoietin, EPO)과 같은 펩타이드 및 단백질 제재 자체를 검출하는 바이오도핑 분야로써, 항원 항체 반응을 주 원리로 하는 신규 분석법 개발 등이 있다.
앞서 센터 소개를 약간은 거창하게 써내려 갔지만, 도핑콘트롤이란 분야는 사실 유명한 선수들의 도핑파문이나, 올림픽 같은 대규모 국제대회가 있지 않으면 세간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분야이고, 세계적인 연구 규모로 보아도 재정적인 면이나 인력 면에서 약소한 분야이다(2018년 3월 현재 기준으로 전세계 28개의 랩만이 WADA의 공인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혹은 결과 해석상 풍부한 경험적인 이유)로 올림픽 같은 국제 행사를 진행하는 각 나라의 도핑 시험실의 경우 다른 나라의 전문 도핑 인력을 초청해 분석업무에 지원토록 하고 있으며, 이번 2018 평창올림픽에도 전 세계 10여 개 국의 도핑 시험실로부터 40여 명의 expert를 초청해 24시간 교대 분석함으로써 성공적인 평창올림픽이 되도록 지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타 연구분야와는 상대적으로 마이너할 수밖에 없는 도핑콘트롤 분야는, 어쩌면 태생적으로 마이너한 선택을 선호하는 나와 궁합이 잘 맞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나 또한 이 곳 KIST도핑콘트롤센터에 입원을 하기 전까지는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뿐만 아니라, 당연하게도 관련 연구 및 업무를 수행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조차 알지 못하였으니, 이 기회에 일반인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관련 분석화학 및 약리학, 혹은 생물공학 전공자들에게 이 분야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 글을 계속하는 탓 중 하나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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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패럴림픽과 과학인으로서의 단상


글을 쓰고 있는 3월 초 현재, 평창패럴림픽의 선수촌은 이미 개장하여 경기 전 검사 시료의 배송 및 분석이 진행되고 있고, 내일이면 오프닝 세레모니와 함께 본 대회 경기들이 시작될 테지만, 앞서 지난 달 끝난 평창올림픽 때의 뜨거운 관심과 열정보단 세간의 관심이 모아지지 않은 것 같아 개인적으로 안타깝다. 신체적 장애에 기인하여 가능한 동계스포츠의 경기 종류 자체가 적을뿐더러, 전체적인 대회 규모 또한 올림픽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기에, 혹은 금메달을 좋아하는 여론 특성상 메달권 선수들이 현저히 적기에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한 건 어쩌면 당연지사인지 모른다(심지어 중계방송 시간 조차 적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4 년 여간 갈고 닦아 온 스포츠 기량들은 올림픽 설상 종목 금메달리스트인 스켈레톤 계의 아이언맨, 윤성빈 못지 않게 관람객들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할 것이고, 개개인의 장애를 딛고 경기를 치르는 패럴림픽의 매 경기 장면 하나하나에 금메달이 보이는 건 어쩌면 내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굳이 메달 이라는 결과가 아닐 지라도, 국제대회에 도전하여 세계적인 선수들과 자웅을 겨루는 그 자체가 박수 혹은 나아가 지속적인 관심을 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지난 달 평창올림픽 도핑분석을 함께 했던 몇몇의 인턴교육생(대부분 4~5학년 학부 졸업예정자이다.)들 중 일부가 쉬는 시간을 쪼개어 대학원 진학 상담을 해왔다. 대학원을 진학하고 싶은데, 지도교수님이나 실험실을 컨택할 때 무엇을 알아봐야 하는지 답을 해달란다. 이 같은 질문이 오히려 궁금해 되물어 보았다. 무엇을 알아봐야 할까? 주변에서 주워 들은 풍문으론 Impact Factor가 높은 저널들에 논문이 잘 나오는 실험실인지, 혹은 연구비가 충분한 실험실인지가 중요하다 했단다. 언젠가 나도 들어봤던 혹은 누군가에게 쉽사리 전달했던 말이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으로 연구하는 환경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기에 쉽사리 반박하진 못했다. 다만 늦깎이 과학도로서 생물공학에 대해 좀더 깊게 연구해 보고자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고, 학위과정 중 질량분석기 자체에 매료되어 연구에 몰두하다 도핑콘트롤이라는 비주류 과학분야를 연구하는 지금의 나에게 돌아온 대답을 들었을 때, 조금은 씁쓸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특정 연구분야의 과학적 호기심이나 지적 탐구심만으로 대학원진학 및 실험실을 찾아 보라고 하기엔 취업 걱정에 급급한 그네들에겐 위화감 넘치는 답변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그저 난 아주 찰나의 시간이라도 우연히 들었던 인상 깊었던 세미나라던가, 학부과정 이수했던 전공 과목들 중 흥미를 느꼈던 연구분야가 있는지, 그 전에 한 분야에 몇 년간이나 지속하게 될 연구과정을 묵묵히 버텨낼 자신이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라 권했다. 단기간에 논문을 많이 쓰지 못하는 기초과학도, 혹은 연구비가 넘실대는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못하는 비주류 연구를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이공계 과학의 밑바탕으로써 인정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므로, 국제대회 경기에 도전하는 것 자체에 존경 받아 마땅한 모든 패럴림픽 출전 선수들처럼 어느 곳에 속해 어떤 연구를 하더라도 겪게 될 학위과정의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지구력이 있는지를 우선 생각해 보라는 것이 지금의 내가 교육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저 우연이라도 이 글을 보는 대학생, 혹은 대학원을 꿈꾸는 후배들이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에필로그


얼마 전 선임연구원 승격 발표를 준비하면서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서의 KIST와 도핑콘트롤센터 발전에 있어 중간 핵심리더로서의 허리역할 및 장기적인 도핑인력 양성에 기여하겠다는 비전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심사 숙고했던​ 발표가 끝나고 평가임원 중 한 분에게서 건네 받은 키워드는 바로 책임과 끈기였다. 어쩌면 진부한 조언이기에 얼떨떨한 기분과 함께 금새 잊었다 생각했으나, 눈 붙이려 누웠던 그날 밤 머리 속에 맴돌던 두 단어는 나를 쉽게 잠들지 못하게 했다. 지금의 내가 선임연구원으로서 새로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 비록 대중에 혹은 과학계에서도 흔하지 않은 분야의 출발선에 서 있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맡은 자리에 묵묵히 연구를 하다 보면, 혹은 책임감 있게 후진양성에 조금씩이나마 기여하다 보면, 언젠가는 사시미가 되어있을 달빛요정의 스끼다시 내인생의 가사처럼 과학계의 네오-마이너리즘을 현실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슬쩍 어림 짐작해 본다. 올림픽 분석에 몇 주째 눈 밑에 쌓아온 피곤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했던 밤이었지만, 앞으로 계속할 연구에 대한 방향성과 “젊은 BT인”으로써 가져야 할 사명감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터닝포인트로 기억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며칠 간 과거를 돌이켜보니, 인생의 결정적 시기의 나에겐 실험실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함께 했던 것 같다. 학부 때 처음 만난 나이는 많지만 철없던, 유독 케냐 커피를 좋아했던 선배와의 인연은 20대의 진학 고민하던 나를 이공계 대학원으로 이끌었고, 관악산 중턱의 성냥갑 같은 실험실에서 처음 만난 유독 냉랭한 표정의 이가 좋지 않은 선배는 졸업한 지금에도 종종 만나 먼저 지나온 인생의 조언을 아낌없이 주고 있다. 특히 학위과정 중 지도교수님께 배웠던 ‘과학은 휴먼네트워킹이다’라는 가르침은 실제로 공동연구의 효율성을 뼈저리게 깨우쳐 주었고, 현재 과학 및 산업계 여러 분야에 중책을 맡고 있는 MBBL 선후배들과의 인연은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자산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했다. 이 기회를 빌어 현재의 내가 있을 수 있게 도움 주신 모든 인연들과 사랑하는 부모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