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워라밸
Date 2019-04-09 15:25:29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916
박주현
교수
강원대학교 생물의소재공학과
juhyunpark@kangwon.ac.kr

요즘 20, 30대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워라밸’이라고 한다. 워라밸은 일(work, 워크)과 생활(life, 라이프)의 균형(balance, 밸런스)을 의미하기 위해 각 영단어의 한국식 발음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약간은 정체불명의(?) 신조어이다. 일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대부분을 쏟아 부었던 예전 세대들과 달리 지금의 세대는 일을 통해 얻을 성공의 가능성과 경제적 보상보다 이것들을 조금 포기하고서라도 일 외에 지금의 내가 흥미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에 투자하고자 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이를 잘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워라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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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최근의 워라밸 열풍을 보여주는 기사들


이것은 아마도 이 글을 읽을 많은 연구실의 대학원생들, 그리고 젊은 연구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필자가 대학원 생활을 했던 10~15년 전에는 지하철이 끊길 때가 되어서야 집으로 향하고 1주일에 2~3일은 실험실에서 밤새도록 일을 했으며 주말에 실험실로 출근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필자의 지도 교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강제하시지 않으셨고 당시 환경에 비하면 파격적으로 학생들에게 자율적인 실험실 생활을 보장해 주신 분이셨지만 필자는 이런 타이트한(?) 삶을 대학원생의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생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필자의 경우만이 아니라 당시 대학 연구실에서 공부하는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지금도 이렇게 생활하는 연구원들이 많겠지만 규칙적인 출퇴근 시간을 갖고 주말에는 실험실보다는 본인의 취미 생활을 위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워라밸을 중시하는 연구원의 비율이 예전보다는 확실히 높아진 것 같다. 주변의 동료 교수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러한 최근 학생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우려를 나타내시는 분들이 많다. 특히 생물공학 연구라는 것이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만큼 늘 실험 생각을 하고 실험실에 붙어 있어도 모자란데 워라밸을 따지며 일을 하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걱정들이시다. 필자는 스스로 젊은 연구인이라고 생각하는 만큼 학생들의 생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이 대목에서는 상당 부분 동료 교수님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그렇죠, 이렇게 하면 언제, 어떻게 좋은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쓸 수 있을지 말입니다.’ 필자도 밤낮없이 실험실에만 붙어 대학원 생활을 보낸지라 영락없이 ‘꼰대’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적어도 대학원생의 생활이라는 점에서는 내 생각이 옳다고 생각해 왔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문득 스스로가 대학원생 시절에 그렇게까지 많은 시간을 실험실에서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내가 하는 연구에 흥미가 있고 이러한 과정을 즐긴 것이 하나의 이유였을 것이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던 실험을 하던 중 어떤 논문에서 힌트를 얻고 이를 적용한 후 그 결과를 기다릴 때의 두근거림, 마침내 원하던 결과를 얻었을 때의 짜릿함, 이러한 것들이 연구라는 것을 즐겁게 만들고 계속 열정을 쏟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연구라는 것이 잘 되는 날보다 안 되는 날이 훨씬 많다 보니 이런 두근거림과 짜릿함만으로는 그 열정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것 외에 그 열정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또 다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필자에게는 이러한 과정을 마치고 난 후에 주어질 보상이 또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박사과정 중 실적을 잘 쌓아 좋은 곳에서 포닥을 마치면 원하던 대로 교수나 정출연 연구원이 되어 독립적으로 연구를 하거나 아니면 기업에 들어가 첨단의약품을 개발하는 연구원이 될 수 있을 거야.’ 이것이 필자가 대학원생일 때 막연히 생각했던 미래였고 그 당시 졸업한 선배들이 선택하는 진로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만큼 다분히 현실적인 목표였다. 인내 끝에 주어질 노력의 보상을 확신했기에 삶의 다른 부분들을 일정 부분 포기하고서라도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연구원들의 노동 시장 환경은 점점 엄혹해져 갔다. 사회 전체적으로 젊은 세대들의 구직과 사회 진출이 어려워지고 있는 만큼 이것이 연구원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석·박사인데’, ‘외국에서 포닥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지금 있다면 구직 활동을 할 때 짐짓 놀라게 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근래 국내 대학들의 연구 수준이 이전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석·박사 학위 취득자의 수도 증가하였다. 예전이라면 아주 우수하여 대학 및 정출연에 가기에 충분한 수준의 연구 업적이었겠지만 지금은 평균 정도가 되어버릴 정도로 연구원 개개인의 능력과 실적도 이에 따라 엄청나게 향상되었다. 기업의 연구 수준도 향상되어 특색없는 연구 경력으로는 면접을 보는 것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아마도 전문 인력의 양적, 질적 수준 증가에 비해 이들을 수용할 만큼의 일자리는 증가하지 않으니 경쟁만 엄청나게 치열해진 데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경쟁력 있는 연구 실적을 갖춘다는 것이 나날이 어려워지니 공들여 노력했는데도 나보다 뛰어난 괴수(?)들이 늘 있고, 그로 인해 기회가 나에게까지 오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내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연구하는 데 ‘갈아 넣는’다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필자가 최근 한 학생과 면담을 하던 중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너는 왜 네가 가진 100%를 공부와 연구에 투자하지 않니?”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100%를 쏟아 붓는다고 해도 제가 원하는 직업을 탁! 갖기 힘든 지금의 환경이잖아요. 그렇다면 오히려 2~30% 정도는 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100%를 투자했는데도 실패하면 다른 도전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겠지만 나에게 투자된 2~30%가 남아있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다시 힘을 내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체가 워커홀릭(workaholic)이라 할 만큼 중노동을 하며 살아왔다. 가장 큰 이유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이러한 노력을 언젠가는 온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고생하면 좀 더 큰 집으로 옮길 수 있어.’, ‘조금만 더 하면 좋은 대학에 가서 원하는 직장에 갈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노력에 대한 보상이 보장된다면 내가 가진 모든 능력과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도 그것이 아깝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워커홀릭한 삶에 따른 부작용들도 우리는 많이 목격해왔다. 건강 검진할 시간도 없이 일하다 한창나이에 큰 병을 얻은 사람, 가족들과의 대화와 추억이 없어 퇴직 후 가정에서 겉도는 부모님들, 평생을 바쳐 일한 직장을 대책 없이 떠밀리듯 나오게 된 가장들. 이렇게 보면 세계 경제 흐름과 함께 국가 경제가 성숙 단계로 접어들며 저성장이 일상화되어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거라는 장담이 없는 요즘 사람들이 이러한 부작용들을 경험하며 이제는 ‘워라밸’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이공계 연구 인력들이 워낙에 자기 시간과 열정 대부분을 들여 연구에 몰두해왔고 그것이 당연시 되어왔던 만큼 최근의 ‘워라밸’은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이미 자리를 잡은 연구원들에게도 어쩌면 당연한, 그리고 필요한 키워드이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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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필자의 가족사진. 더 많은 시간을 가족들과 보내야 할 텐데 말이다.


필자의 연구실은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단계이지만 학생들에게 어떻게 비전을 제시하고 동기를 부여할 수 있을지를 늘 고민하고 있다. 예전 나의 경험대로 늘 밤늦게까지, 주말에도 출근하면서 온 정성을 연구에 투자하라고 하면 우리 학생들에게 설득력이 있을까? 그리고 그것이 이 친구들에게 효과적일까? 늘 많은 고민을 한다. 요즘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충분한 휴식 시간이 연구의 효율을 향상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불필요하게 실험실에 오래 남아 있지 않도록 하고 일종의 연차휴가를 통해 개인적인 시간을 갖는 것을 장려하려 하고 있다. 또, 학생들과의 미팅에서도 실험 결과에 기한을 두고 몰아붙이기보다는 차근차근 공부하고 고민해보면서 실험을 진행하며 생긴 문제점들을 해결하도록 해 그 과정에서 연구에 흥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물론 노력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늘 반성하고 있다. 이 글을 필자 연구실의 학생들이 볼 수 있으니 노력 중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 역시 스스로 워커홀릭한 라이프 스타일에서 벗어나고자 노력 중이다. 맹목적으로 많은 연구비를 수주하고 높은 인용 지수를 가진 저널에 논문 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의미가 있으면서 사회에 보탬이 되는, 무엇보다 나의 과학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려고 한다. 높은 수준의 실적을 목표로 한다면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실패가 되겠지만 의미 있는 연구를 목표로 하고 내가 수행 중인 연구에서 그 의미를 발견한다면 늘 성공하는 연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초보 교수인 관계로 당분간은 많은 연구 실적을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또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운동과 같은 취미 생활에도 시간을 투자하려 노력 중이다. 일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닌 만큼 삶의 다른, 어쩌면 일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가족, 건강에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일 외의 다른 삶의 요소들이 그 ‘일’에서 어려움과 좌절을 겪을 때 힘을 주어 이를 극복할 에너지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오랜 기간 많은 경험을 하신 선배 교수님들에 비하면 아직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 초보 교수라 조심스럽지만, 학교에 부임해서 학생들을 만나며 든 생각들을 적어보았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이러한 ‘워라밸’ 중시 풍토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여러 사회적인 상황들을 함께 생각해 보니 납득이 가는 부분들도 많았다. ‘인내는 쓰지만, 열매는 달다.’라는 표어보다는 적절한 휴식과 ‘나’를 위한 투자가 도전을 위한 열정의 밑거름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연구자에게는 과학적 호기심과 의미 부여가 연구에 대한 가장 큰 동기가 아닐까 한다. 진정 흥미를 느끼고 재미있는 일이라면 그것이 ‘초과 근무’라기보다는 ‘놀이’로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앞으로 연구에 대한 흥미라는 초심을 늘 잊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