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 사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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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9-20 11:03:47 | hit 82 |
최근 학술대회 안내 브로셔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난다. 저명한 국제 초청인사들, 늘어난 발표 논문수, 다양한 참여기업들이 학회가 질적, 양적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40년 전, 다락방에서 출발한 학회가 지금은 목을 젖혀야 꼭대기가 겨우 보이는 40층 대기업이 된 것 같다. 이런 역사를 가진 생물공학회의 멤버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나에게 생물공학회는 큰 선물이다. 아주 괜찮은 사람들을 만났으니 말이다. 학회가 끝나고 달빛이 고고한 복사꽃 아래 막걸리 한잔에 ‘이화에 월백하고’ 운을 띠우던 모습들이 가슴을 채운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없어질 때, 그 사진들이 날 미소 짓게 만드는 걸 보면, 나에게 생물공학회는 천 년 된 산삼이다.
대학 시절, 우연히 시작한 바이오 분야는 나에겐 밤낚시였다. 낚싯줄이 팽팽해지고 손이 덜덜 떨리는 손맛을 한번 본 낚시꾼은 반짝반짝 빛나는 찌에서 밤새 눈을 못 뗀다. 내 손에 짜르르한 붕어 손맛을 처음 전한 건 박테리아다. 현미경을 확대해야만 꼬물꼬물 눈에 겨우 보이는 박테리아가 외부 침입자 DNA를 자르는 무기인 제한효소를 만든다는 걸 알고 얼마나 감탄 했는지, 그때의 놀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더구나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그걸 이용해서 유전자를 자르고 붙이는 재조합 기술이 세상에 선보였을 때는 ‘아이고, 하느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두 번째 붕어 손맛은 펄떡거리는 월척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박테리아, 바로 그놈이다. 자기 몸에 침입한 파지 바이러스 DNA를 조각조각 내서 차곡차곡 DB로 만들어서 가지고 있다는 거다. 게다가 같은 놈이 다시 침입하면, 그 DB를 찾아내서 침입한 바이러스 DNA를 사각사각 가위질해 버린다. 박테리아들도 인체의 후천면역처럼 침입자에 대한 기억력이 있다니, 세상에! 먼지만도 못한 놈들인 줄 알았더니, 웬걸, 가장 똑똑한 동물인 사람처럼 침입자를 기억하고 응징한다니, ‘오매, 징한 놈들!’. 두 번째 월척에 놀란 나를 한방에 녹다운시킨 건 이런 후천면역기능을 이용해서 만든 ‘유전자 가위 기술’이다. 30억 개 DNA 염기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찾아 들어가 원하는 염기를 마음대로 바꾸는 21세기 최고 기술이다. 놀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럼 세 번째로 낚싯대를 활처럼 휘게 만드는 놈은 또 어떤 걸까?
요즘 내 낚싯대에 슬슬 입질을 시작하는 놈들이 있다. 면역세포들이다. 그중에서도 조절세포(Treg)다. 면역에 브레이크를 거는 놈들이다. 이런 브레이크가 없으면 면역 공격세포들이 자기 몸에 계속 총을 쏴대는 ‘자가면역질환’에 걸린다. 조절세포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흥미로운 놈들이다. 이놈들을 유혹하는 놈들이 따로 있다. 슬쩍 돈봉투를 돌리고, 날 봐주면 대대손손 먹고살게 해주겠다고도 한다. 바로 암세포들이다. 암세포를 보자마자 칼을 빼 들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게 면역 공격세포다. 이걸 뒤에서 슬쩍 잡아당기는 조절세포야말로 암세포들에게는 구세주다. 실제로 암세포들은 유혹물질(CCL-22)을 내뿜어 조절세포를 자기편으로 만든다.
이런 상황이니 조절세포는 처신을 잘해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조절세포는 면역의 중요한 멤버라는 거다. 침입자나 암세포를 만나면 날아오르는 불꽃처럼 화끈하게 공격하고 다 죽였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쿨한 상태로 돌아와야 건강한 면역이다. 불과 물, 냉정과 열정의 밸런스를 잡는 게 조절세포다. 이놈들이 입질을 시작한다. 피라미일까, 아니면 월척일까.
낚시에서 손맛을 보려면 정성을 들여야 한다. 우선 어떻게 입질이 시작되는가를 알아야 한다. 고기 입질에 따라 찌가 달리 반응한다. 갑자기 쑥 들어가 버리면 대부분 피라미다. 하지만 서서히, 신중하게, 그러나 찌가 뒤집힐 때까지 끝까지 밀어 올리는 놈들이 있다. 월척이다. 이때가 중요하다. 침착해야 한다. 냉정해져야 한다. 올라오는 순간을 하나하나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찌가 뒤집히기 직전에 폭발하듯, 열정적으로 낚싯대를 잡아채야 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 밸런스를 유지하는 기술에 따라 월척인가, 아니면 허탕인가가 결정된다. 냉정과 열정의 기술을 공부해야겠다. 마침 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다.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일본, 2001)는 연인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준다. 영화 속 두 연인은 십 년 만에 이태리의 피렌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하지만 금방 타오를 듯했던 두 사람 사이는 냉정과 열정의 롤러코스트를 탄다. 멜로물에서 흔히 보던 밀고 당김이 아니다. 두 남녀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다. 다만 외부 환경이 그 둘을 맺어주지 못할 뿐이다. 두 연인의 엇갈림이 보는 사람을 애타게 한다. 이태리 피렌체의 좁은 골목을 자전거로 다니는 두 연인을 보는 순간, 나에게 문제가 생겼다. 직업의식이 발동한 거다. 좁은 골목이 인체 혈관으로, 골목을 잇는 오솔길이 림프관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키스하는 여주인공이 면역 조절세포로 변했다. 드디어 두 사람 사이 달달한 대화가 세포사이 언어로 자동 번역되어 화면에 보인다. ‘아이쿠, 정신 차리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조절세포를 암 환자 편으로 만들면 어떨까. 실제로 암 환자들의 림프절에는 조절세포가 정상인보다 세 배나 증가해 있다. 당연히 암 환자들의 면역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간단해진다. 조절세포가 면역 공격세포 브레이크를 밟지 않게 하면 된다. 그러면 면역 공격세포들이 암세포를 더 강하게 공격하게 되고, 암은 훨씬 쉽게 치료될 수 있다. 암세포가 면역 공격세포의 브레이크 페달을 못 밟게 하는 ‘면역관문억제제’가 암세포를 깔아뭉개고 있다. 조절세포가 면역항암제의 새로운 분야로 떠 오르고 있다. 세 번째 낚시 이야기를 써 봐야겠다. 소설 제목을 뭐라고 할까? ‘냉정과 열정 2’?. 속편은 재미없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가끔 만나는 학회 선후배들에게 물어보자. 아니다, 그걸 빌미로 한번 만나봐야겠다. 요즘 기력이 떨어진 것 같은데 생물공학회가 만들어준 산삼 한 뿌리를 먹어보자.
실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생물공학회에서 세 번째 월척을 낚는 거다. 낚싯대가 휘익 휘면서 줄에서 ‘핑’ 소리가 날만큼 힘이 센 월척을 낚아보자. 그게 ‘조절세포 이용 항암제’라면 ‘실화에 바탕을 둔’이란 근사한 수식어가 내 소설에 붙지 않을까?. ‘이런! 떡도 없는데 김칫국을 마시고 있구나.’ 그래도 좋다. 김칫국도 많이 먹어봐야, 떡이 더 맛있다.
학회 여러분들, 월척 하나 낚아봅시다. 더불어 학회에서 키우는 산삼 한뿌리씩 먹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