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생물공학자의 첫 12년 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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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2024-09-22 16: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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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열정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연구실에 처음 출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2 년이 흘렀다. 한때는 간단한 실험조차 벅찼던 신입 연구원이었지만, 이제는 연구의 방 향성을 설정하고 기획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현재는 미국에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을 마무리하는 단계로 곧 독립된 연구자로서 첫걸음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도전 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을 통해 내가 지나온 연구의 길을 소개하고 그 과정에서 얻 은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여정의 시작
어릴 적부터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과학자들을 동경하며 연구자의 꿈을 품었고, 언 젠가는 학문이라는 거대한 탑에 나만의 작은 조약돌 하나를 얹겠다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학창 시절 완성되고 정제된 과학의 세계를 마주하며 경외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많은 것이 발견되었다는 아쉬움과 나의 작은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고민했었다. 하지만 연일 뉴스에서 화제가 되는 첨단 과학 분야의 발전을 접하며, 교 과서 밖의 새로운 영역이 무궁무진함을 깨달았고,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꿈에 다시 불 을 지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비로소 과학 지식의 경계를 확장해 나가는 현장에 가까 워졌다. 연구자의 꿈을 구체화하고자 다양한 학문 분야의 수업과 세미나를 수강하며, 앞으로 사회에 필요한 기술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어디에 흥미를 느끼는지 찾아보 고자 했다.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지속가능성과 친환경적인 기술에 대한 요구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생물공학에 빠져들었다. 특히 상온, 상압, 수조건에서 무기촉매가 흉내 낼 수 없는 반응을 가능하게 하는 생촉매에 매료되어 서 울대학교 김병기 교수님 연구실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박사과정 동안 cytochrome P450 (CYP) 효소와 flavin-monooxygenase (FMO)를 이용한 인디고이드는 크게 인디 고(청바지 염료)와 인디루빈(잠재적 항암물 질)이라는 2가지 구조이성질체로 구성되는 데, 세포나 효소로 합성을 하면 이 2가지 물 질들이 섞여서 만들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대부분 생물공학 연구가 목표하듯 많은 인 디고이드 연구가 대량 생산에 집중했지만, 나는 생산량 증대 연구에서 벗어나 생산 조 건에 따라 두 구조이성질체의 비율이 달라 지는 원인을 파악하고자 효소를 이용한 인 디고이드 합성 과정을 깊게 들여다보기 시 작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독특한 중간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인디고이드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의 특성과 인디루빈의 선택적 합성 방법 및 메커니즘을 밝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디고나 인디루빈의 대량 생산을 넘어서 다양한 인디고이드 유도체 합성 경로를 제시할 수 있었다. 이는 이후 여러 흥미로운 후속연구로 이어졌다. 주류 연구에서 벗어나 새로운 접근법을 선택함으로써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지만, 효소를 이용한 특정 물질군의 합성 과정을 혁신적으로 개선하는 결과로 이어져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여 얻은 이 성취감은 지금까지도 나의 연구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러한 도전적인 박사과정을 돌이켜보면, 김병기 지도교수님과 MBBL 연구실 동료들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끊임없는 응원이 있었기에 이 연구를 완성할 수 있었다. 김병기 교수님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셨고, 지식과 연구 자원은 물론 협동연구의 기회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셨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연구실 동료들은 내가 기쁠 때나 힘들 때나 함께해 주었고,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끊임없는 동기 부여와 자극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든든한 환경과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행운이 있었기에 짧지 않은 박사과 정을 마치고 현재의 나를 있을 수 있게 했다.
시련의 과정과 사고의 전환
학위 과정 동안 연구가 항상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대학원에 입학해 나에게 처음 주어졌던 프로젝트는 식물 유래 CYP 효소를 미생물에 발현시켜 인삼의 유효성분인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 또는 천연 항산화제인 미리세틴 (myricetin)을 합성하는 일이었다. 값비싼 식물 유래 화합물을 미생물에서 비용효율적으로 합성하는 아주 매력적인 주 제였기에, 이 연구에 매진하며 효소 발현과 활성 및 생산성 증대를 위해 당시 발표된 거의 모든 종류의 효소공학과 세 포공학 방법들을 시도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이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다른 생물 체에서 유사한 기능을 가진 효소를 찾는 것이었는데, 기존 효소 특성화 데이터가 부족해 활성이 좋은 효소를 찾는 것은 운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런 불확실성에 더해 미생물에서 식물 유래 효소를 발현시키는 것 자체가 큰 난관이었다. 나는 이를 위해 논리적으로 설명이 어려운 접근법들까지 모두 시도해 보았지만 쏟아부은 노력에 비해 결과물은 미미했고 큰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더 힘들게 했었던 것은 해당 실패로부터 의미 있는 정보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조차 얻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단백질공학 연구에서 ‘운’에 의존한 접근법들의 한계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해당 시기에 유 사한 시도를 성공한 논문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성공과 내 실패와 같은 점이 있다면 왜 성공했는지 또는 실패했는지 명 확하게 설명해 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근본적으로 더 효율적인 생물공학 연구를 위한 방식에 대한 고 민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연구 방향을 새롭게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빅데이터와 머신러닝을 연구에 도입하기 시작했을 때, 나 역시 빅데 이터 기반 방법론에 관심을 갖고 단백질 특 성 연구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지금까지 축적된 단백질 특성화 데이터에 빅데이터 방법론을 적용함으로써, 그동안 생물 시스템의 복잡성 때문에 명확한 이해 없이 받아들여 온 경험적 방법론들보다 효 율적이고 합리적인 연구 방법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의미 있는 통 찰을 얻기에는 내 연구와 관련된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했고, 이 경험을 통해 빅데이터 연구의 성공을 위해서는 연구 목적에 맞는 양질의 생물학적 빅데이터를 효율적으로 생산하는 방법 개발이 선행되어야 함을 깨 달았다. 이에 효과적인 생물학적 빅데이터 를 생성하기 위한 high-throughput 방법을 개발하는 컬럼비아 대학교 Alejandro Chavez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박사후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연구실은 주로 동 물세포 배양과 세포 내 단백질 분석을 다루고 있어, 미생물과 화학물질 분석에 치중했던 내 박사과정 경험과는 큰 차이 가 있었다. 하지만 생물공학이 나아갈 방향에 이러한 새로운 기술이 필수적이라 믿었기에 새로운 여정에 과감히 뛰어 들었다.
그림 2. UCSD Alejandro Chavez 교수님 연구실 - 2023년 가을 Chavez 교수님 집 뒤 마당에서.
미국에서의 새로운 챕터
Chavez 교수님의 연구실은 다양한 생물학적 라이브러리 구축을 통해 고속 스크리닝 연구와 새로운 단백질 변이주 제 작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나는 동물세포에서 대규모 단백질 태깅 방법을 개발하는 도전적인 과제를 맡았다. 기존 단백 질 기능 연구에서는 단백질마다 특이적인 항체가 필요해 다수의 단백질을 동시에 연구하기가 어렵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서로 다른 단백질들에 같은 펩타이드 서열(태그)을 붙이면, 이 태그를 매개로 하나의 항체나 통일된 분석법으로 여러 단백질을 한꺼번에 연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 방법을 통해 단백질 연구의 항체 의존도를 줄이고 연구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3년 반의 박사후과정 기간동안, 박사과정 동안의 연구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시도 끝에, 마침내 단일 종류의 태그를 이용해 하나의 분석 방법으로 다양한 단백질을 대규모로 특성화할 수 있 음을 입증해 낼 수 있었다. 새로운 연구분야가 기존 전공분야와 크게 달라 어려움도 있었지만, 기술의 혁신성과 가능성 에 매료되어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Chavez 교수님 연구실의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문화는 새로운 연구 영 역에 도전하는 데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생소했던 동물세포 실험들과 빅데이터 분석을 위한 코딩 등 이전에 내가 경 험하지 못한 일들을 수행하는 데 다른 연구원들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구원들과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실패한 데이터에서도 지식을 발견해 가며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과학 의 진정한 힘이 공유와 협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직접 깨달았고, 이는 과학자로서 나의 접근 자세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박사후과정 동안에도 약간의 역경이 있었다면, 내가 미국에 온 지 2년이 지나 이제야 적응을 마쳤을 무렵 뉴욕 컬럼 비아 대학에 있었던 Chavez 연구실이 UCSD로 이전하게 된 것이다. 다음 커리어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연구실이 이사 를 가야한다는 것이 당시에는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왔 지만, 돌이켜보면 미국 동부와 서부의 두 도시에서 해본 타지 생활은 한 개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었다. 뉴욕에서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만들어 내는 도시 의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었고, 샌디에고에서는 광활한 자 연과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 삶의 균형을 찾아보게 되었다. 한국을 벗어나 느낀 두 도시의 경험은 그동안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사고방식을 벗어나게 해주었고 내 삶의 방식 을 재정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낯선 환경에서의 독립은 내가 어떤 환경에서 더욱 생산적이고 행복한지를 이해하는 여정이 되었고, 내적으로 더욱 건강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앞으로는 박사과정과 박사후과정에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융합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데 도전해 보고자 한 다. 단백질체 (proteomics)가 세포 내 단백질 농도 변화에 집중하고 있다면, 나는 ‘기능성 단백질체 (functional proteomics)’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세포 내 단백질들의 기능을 대규모로 정량 분석하는 도전적인 시도를 하고자 한다. 최신 유전자 편집 기술과 데이터분석 기법을 활용하더라도 다소 야심 찬 목표가 도전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과학 의 발전은 항상 대담한 가설과 끈질긴 탐구정신에서 비롯되었기에, 나 또한 이 도전에 임해보고자 한다.
그림 5. 미국에서 첫 포춘쿠키 운세 - Knowledge is power. 계속 연구하란다.
마무리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니, 매일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어느새 지식의 탑이 쌓여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앞으로도 변함 없는 노력으로 어릴 적 동경하던 그 탑을 더 높고 견고하게 만들어 갈 것이다. 내년 초, 한국으로 돌아가 연구책임자로 서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샌디에고의 아름다운 수평선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꿈꿔왔던 막연한 미래를 이제는 한국에서 현실로 맞이할 생각에 커다란 설렘과 막중한 책임감이 교차한다. 스승님들과 동료들로부터 배운 지식과 지혜, 그리고 모든 경험을 발판 삼아 끊임없이 성장하는 학자가 되고자 한다. 한국 생물공학 발전에 연구와 교육 양면에서 기 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친다.
기고 기회를 주신 덕성여대 박현준 교수님, 국민대 서주현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참 과학자이신 지도교수님 서울대 김병기 교수님과 UCSD Alejandro Chavez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학위 과정 동안 동고동락한 MBBL 동료들과 Chavez Lab 동료들, 뉴욕과 샌디에고에서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무엇보다 여기까지 오는 데 응원 을 아끼지 않았던 가족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