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자의 길: 실패와 성장, 그리고 새로운 시작
Date 2025-03-31 18:48:56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234
윤진영
박사후연구원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센터
jyyun@krict.re.kr

들어가며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BT 스토리 원고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제 막 첫 직장에서의 적응을 마친 풋내기 포닥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걸어온 길을 정리하는 것이 앞으로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내가 연구자의 길을 걷게 된 계기와 박사학위 과정을 통해 배운 것들, 박사후연구원으로서의 삶을 솔직하게 나누어 보고자 한다.

 

연구자가 되기까지


   어릴 적부터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나는 명료하고 깔끔한 논리의 세계에 매력을 느꼈다. 답이 정해져 있고, 과정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너무 좋았다. 화자의 숨겨진 의도가 담긴 선택지를 하나만 골라야 해서, 납득이 잘 가지 않아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야 하는 등의 일이 없다는 것이 참 속 시원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이 단순히 정답만으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대학 시절, 강의에서 배우는 이론은 정리가 잘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점을 체감했다.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내가 기대했던 만큼의 성장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공 지식이 머리에 쌓이기만 한 고등학생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의해 잘 정리된 것을 익히기만 할 뿐,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갈망이 해결되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이런 갈증이 가장 큰 파이를 차지했던 것 같다.

   ​학부 전공으로 신소재공학을 선택한 후, 수많은 소재 중 생체재료가 유독 눈에 띄었다. 살아 있는 조직과 닮은 특성을 지닌 재료가 어떻게 인체와 상호작용하는지 탐구하는 일은 정말 흥미진진했다. 이후 해양수산부가 주최한 공모전에 참가하면서 해양생물에서 유래한 생체재료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해양생물 유래 생체접착재료에 대해 연구하며 이를 조직공학에 적용하는 차형준 교수님의 연구실에 입학해 석박사 통합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학원 생활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도전적인 과정이었다. 연구는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었고, 때로는 내가 옳다고 믿었던 가설이 무너질 때마다 혼란과 좌절을 겪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단순히 공부를 잘하는 것과 연구를 잘하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특히 긴 학위 과정 동안 여러 번의 시도와 실패를 겪으며 "과연 내가 이 길을 가도 될까?"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분명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는데 아무런 결과를 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고여가는 것 같아 어둡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연구자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연구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두렵고, 틀을 벗어나기를 주저했지만, 학위 과정을 밟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 있게 표현하는 능력을 키웠다. 무엇보다 힘든 시간을 견디며 얻은 경험과 소중한 인연들은 지금도 내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새로운 시작


   박사 학위를 마치고 나서는 연구자로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던 나에게 새로운 분야의 박사후연구원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은 커다란 도전이었다. 다양한 재료와 응용 분야를 탐구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센터 Advanced Polymeric Materials (APM), 점 접착 물질 연구팀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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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한국화학연구원 APM 연구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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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해변에서 즐기는 캠프닉​


   지금 나는 DLP (Digital Light Processing) 방식의 3D printing용 resin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학위 과정에서는 생체재료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중합을 위한 촉매나 공개시제의 화학적 특성을 분석하고 조율하는 일에 집중하며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특히 여러 전공을 가진 동료 연구자들과 협력하며 같은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접근 방식을 배우는 일은 매일이 새로운 배움의 연속이었다. 연구의 깊이를 더하고 폭을 넓히는 데 이런 경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내가 연구하는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센터는 울산에 위치해 있다. 사실 고향이 울산임에도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쭉 포항에서 생활했던 탓에 울산은 나에게도 낯선 도시였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서 살아보니 매력이 가득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울산은 아름다운 자연과 현대적인 도시 인프라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가까운 곳에 영남 알프스 같은 명산이 있어 주말에 등산을 즐기기에 좋고, 동해의 푸른 바다 역시 차로 금방 닿을 수 있다. 특히 몽돌해변에서 캠프닉(캠핑+피크닉)을 하며 조용히 자연을 즐기다 보면 온몸이 재충전되는 기분이다. 또한 부산과 대구 같은 대도시와도 가깝고, 경주나 청도 같은 매력적인 소도시들도 멀지 않아 주말 여행을 즐기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울산은 연구자로서의 삶과 일상 사이에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시다. 연구에만 몰두하다 보면 삶이 단조롭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울산의 자연과 인프라는 그런 내게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니 울산에 있는 한국화학연구원 정밀화학/바이오센터에 관심이 있는데 위치 때문에 망설여진다면, 주저하지 말고, 한번 살아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연구와 일상 사이의 균형을 찾는 데 이 도시가 큰 역할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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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태화강변 산책로


마무리하며


   박사후연구원은 단순히 학위 이후의 연장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새롭게 출발하는 시간이다. 학위 과정 동안에는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질문에 분명히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한다고. 졸업 후, 연구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온전히 탐구에 몰두할 수 있는 지금, 연구가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인지 새삼 깨닫고 있다. 물론 독립적인 연구자로 우뚝 서기까지 많은 도전과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 일을 좋아한다는 마음이 나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어주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연구의 여정에서 얻는 기쁨과 보람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끝으로 BT 스토리에 이 글을 쓸 기회를 주신 양윤정 교수님과, 학위 과정 내내 지도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신 차형준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