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로드맵
Date 2017-10-09 21:52:52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630
최 경 오
교수
수원대학교 화학공학·신소재공학부
kyungoh98@suwon.ac.kr

처음 원고 의뢰를 받고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학교에 임용된 지 만 1년밖에 안 된 새내기 교수라 막 이제 실험실이 셋팅되어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단계인데,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들었다. 그래도 연구를 하고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학생들에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주고 싶은 말은 참 많기에 이 글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주말 오후에 시간을 겨우 만들어서 연구실 책상에 앉았다. 주말이라 조용한 이때 나만의 연구 공간에서 컴퓨터를 켜는데, 이 순간만큼은 참 행복하다는 생각이 든다. 딱 15년 전 석사 생활을 시작할 때, 마음속으로 꿈꿔왔던 나의 모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학원에 진학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15년 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해주고 싶은 것은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연구자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적어도 이런 점들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이다. 물론 100% 정답은 아닐지라도 참고할 만한 점들인 것 같다.


인생의 로드맵
나의 학부 전공은 화학공학이었고, 대학원 진학 시에 어떤 세부 분야를 전공할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다. 화학공학의 경우 그 세부 전공이 생물화학공학부터 시작해서 석유화학, 고분자화학, 반도체, 화학 공정, 환경화학, 정밀화학 등 그 분야가 정말 다양하다. 대학원 세부 전공을 결정한 기준은 ‘내가 꾸준히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 기준은 석사 진학 결정부터 현재까지 결정이 필요한 매 순간마다 적용되는 기준이다. 여기서 ‘꾸준히’하려면 무엇보다 그 대상이 재미있어야 한다. 그리고 생물학 실험을 하는 이들에겐 ‘꾸준히’하기 위해선 엄청난 노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어쨌든 생물화학공학을 세부 전공으로 결정하고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원 과정 동안 앞으로 연구자의 길을 계속 가야겠다는 확신이 들었고, 나름 고민을 거듭해서 로드맵을 설정하였던 것 같다. 그 로드맵은 ‘석사 과정 → 기업체 근무 → 유학(박사과정) → 박사후 과정(Postdoc)’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엔 혼자서 고민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각 단계에 대한 구체적인 세부 조사나 전략 없이 열의만 가지고 정했던 것 같기도하다. 결과적으로 보면 다행히 이 로드맵을 꾸준히 실행해 와서 지금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긴 하지만, 그 당시엔 각 단계를 참 단순하게 생각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다시 그때의 인생의 로드맵을 짜라고 하면 주변 사람의 말도 더 잘 듣고 충분한 조사를 한 다음에 다른 로드맵을 짤 수도 있을 것이고, 원래의 계획이 잘 실행되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할 플랜B도 준비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로드맵을 미리 짜두었기 때문에 낭비하는 시간, 즉 공백이 없었다는 점이다. 한 단계를 완성하는 동안 그 다음 단계에 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늘 다음 단계에 대한 준비를 하였던 것 같다. 당연히 인생의 로드맵은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또한 계획에 없던 우연한 기회가 오히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의 경우엔 정답인지 아닌지 모르겠고, 좀 융통성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인생의 로드맵을 일단 설정하고 그것을 매 단계마다 해내려고 노력했기에 ‘꾸준히’이 길을 걸어왔던 것 같다.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생물공학이라는 분야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꾸준히’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 ‘꾸준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인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을 잘 만나는 것은 어느 정도 운이 따라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경우엔 운이 좋게도 석사 지도교수님, 박사 지도교수님 그리고 연구실 동료들 모두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다. 학위 과정을 하는 동안 지도 교수님, 연구실 동료들과 특별한 트러블 없이 지냈기 때문에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들이 연구를 진행하는데 있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석사 과정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의 날에 교수님 오피스에 모여 케이크도 자르고 스승의 날 노래도 불렀던 날이었다. 교수님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면서 연구실 구성원들을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순간 마음이 크게 요동쳤던 것 같다. 그리고 박사 과정 때 여느 때처럼 교수님 오피스에서 실험 데이터에 대해 토의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교수님께서 학생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뭐든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순간 한 번 더 마음이 쿵쾅 거렸던 것 같다. 그게 뭐 그렇게 특별하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마음이 반응했던 건 아마도 아직 나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시점에서도 학생을 신뢰해준다는 것에 대해 감동을 받아서인 것 같다. 그 신뢰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실험하고 공부하고 그랬던 것 같다.
박사 학위를 받는 마지막 관문은 박사 디펜스이다. 그 날은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라면 인생 중에 꼭 기억에 남는 날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 날이 무사히 디펜스를 통과해서 기억에 남기도 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깨닫게 해준 날이라 더욱 기억에 남는다. 나에겐 딸이 1명 있는데, 그 딸은 박사 디펜스 후 1주일 뒤에 태어났다. 그 말은 즉, 박사 디펜스 때엔 배가 남산만한 상태로 디펜스를 했다는 말이다. 어쨌든 남산만한 배를 들이밀고 디펜스를 무사히 마치고, 지도교수님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보통은 디펜스 때 워낙 많은 말들을 하기 때문에 굳이 따로 얘기를 더하지 않는데, 갑자기 교수님께서 좀 더 상의할 것이 있다고 실험실에 같이 잠깐 올라가자고 하셔서, 좀 의아하긴했지만 실험실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정말깜짝 놀랐다. 원래 성격이 무딘 편이라 웬만해서는 별로 잘 놀라지 않는 성격인데, 그날은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굉장히 놀란 날들 중 하루이다. 실험실 동료들이 베이비 샤워 파티를 준비하고 “서프라이즈~”하면서 나를 반기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비 샤워는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의 순산을 바라면서 축하해주는 행사로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선 보편적이지 않았다. 순간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같았고, 동료들에게 참 미안했다. 사실 미국에서 유학을 하면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아무리 친해지려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언어의 장벽이나 다른 성장 환경 때문에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만큼 친해질 수는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겉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늘 한 발짝 거리를 두고 그들을 대해 왔었는데, 그들은 손수 요리를 만들고 데코레이션을 하고 각자의 선물과 편지를 가져와서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후 과정을 좀 더 하는 동안은 나도 마음을 활짝 열고 지냈다. 그랬더니 동료들과 얘기를 더 많이 하게 되면서 실험 결과에 대한 토론도 좀 더 깊이 있게 나눌 수 있었고, 실험을 하는데 있어 서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도와주면서 일을 하니 실험 결과를 내는 것도 좀 더 효율적이게 되었다.무엇보다도 실험실에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졌던 것 같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점은(비록 나는 뒤늦게 깨달았지만)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 혹은 노력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이는 연구를 수행하는데 있어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ff14519991219132e103f9fa5866ae78_1507553450_4648.JPG

그림 1. 박사 과정 연구실 멤버들

 

다양한 연구 경험
나의 학부전공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화학공학이다. 석사 때는 효소공학, 환경생물공학 연구를 했었고, 이후 회사에 가서는 주로 미생물을 다루는 발효공학 위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박사 때는 비만이나 대장 염증질환과 같은 질병 관련 연구를 동물세포를 가지고 연구했었고, 박사후 과정 땐 컴퓨터 시뮬레이션 위주의 시스템생물학 연구를 했었다. 그리고 현재 수원대학교에선 기존에 해왔던 비만 관련 연구와 함께 화장품 기능성 평가 연구도 새롭게 진행하고 있다. 이렇게 간단히 소개만 해도 좀 특이하다고 느낄 것이다. 보통은 한 가지 실험 모델을가지고 한 분야만 깊이 있게 연구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엔 처음부터 무조건 다양한 연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분야를 접하게 되면 또 다른 분야도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하게 되었을 뿐이다. 석사 과정 때 전기화학과 효소공학을 접목시켜 연구를 하고 나서 든 생각은 내가 생물공학분야 연구를 계속한다면 효소가 발현되는 미생물을 다루는 연구도 해봐야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회사에 다니는 동안 유전자 조작을 포함한 여러 분자생물학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생물공정 최적화 연구도 하면서 균주 개량 연구도 할 수 있었다. 그때 분자생물학 실험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나를 붙잡고 하나하나 가르쳐준 선배 연구원들이 참 고맙게 여겨진다.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 유학을 가서는 내가 키워보지 않았던 동물 세포도 다룰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효소나 미생물을 이용해서 생산한 물질이 우리의 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아 질병 연구를 하는 그룹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연구 그룹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시는 지도교수님 덕분에 박사 과정을 하는 동안 정말 다양한 교수님들과 토론을 하고 실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질병 연구를 하다 보니 학교 내의 약학대학, 수의과대학 연구실들과 공동 연구를하면서 mouse나 rat을 직접 해부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하고 그들로부터 분리된 조직 샘플을 이용한 실험도했었다. 다만 학교 캠퍼스가 너무 넓어서 항상 드라이아이스 혹은 얼음과 실험 샘플들을 들고 운전을 해서 이 연구실 저 연구실 옮겨 다니면서 실험을 할 땐 좀 힘들긴 했었다. 그리고 타 학교의 한 연구 그룹과는 실험 결과를 토대로 생물학적 네트워크 모델을 구축하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연구를 같이 진행했었는데, 같이 공동 연구를 하다 보니 시뮬레이션까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박사후 과정 땐 시스템생물학 연구 그룹에 들어가서 MATLAB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경우에 따라선 한우물만 파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고, 융합 연구를 하는 경우엔 각 분야의 전문가와 공동연구를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나의 판단에는 하고 싶은 연구를 제대로 잘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생물공학 연구에 적용되는 모든 모델에 대한 연구 경험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융합 연구를 하는 경우에도 그 분야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막힘없이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도전해왔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기에 새로운 분야를 배우기 위해 발을 담그는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나만의 전문 역량이 쌓이니 사실 새로운 분야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 그때만큼 쉽지는 않다.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도 무언가를 처음 배우는 데 망설임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다양한 연구 경험은 어떤 연구 결과를 이루어내는 데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나만의 병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마치며
사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어떻게 글을 써내려갈까 고민이 많았는데,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니 비슷한길을 가고자하는 후배들 혹은 제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계속 떠올랐다. 하지만 많은 말들을 열거하면 지겨워질 것 같아 중요한 핵심만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얼마 전 석사 지도교수님의 정년 은퇴식이 있었다. 우선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고,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신 선배님들부터 어린 후배들까지 교수님을 중심으로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이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또 하나의 가족이 모인 것 같아 뭉클했다.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었는데, 은퇴할 때까지 교육자로서 연구자로서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동시에 잘해내야지 하는 다짐도 생겼다. 그래서 제2의 인생 로드맵을 세워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게 되는 분들도 인생의 로드맵을 한번 짜보기를 추천한다. 그것이 정답이 아닐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정한 목표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위기가 왔을 때 흔들리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는 것 같다.

 

ff14519991219132e103f9fa5866ae78_1507553532_563.jpg
​그림 2. 수원대학교 연구실 멤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