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연구원
Date 2020-08-03 16:56:32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375
안준기
선임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휴먼융합연구부문
jkahn@kitech.re.kr

연구자로서 새로운 길의 출발점에서 막 발을 내딛고 있는 나에게 BT News 에세이 투고 요청은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현재 연구원으로서의 초심을 이렇게 남긴다면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연구원으로서의 삶을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좋은 기회를 주신 편집위원님께 감사를 드린다.
즐겨보는 TV 프로그램 중 다양한 분야의 강연을 들을 수 있는 ‘어쩌다 어른’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분야의 경험이 많은 전문가분들의 강연으로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 알아가고 다양한 생각을 해보게 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내용도 좋지만 처음에 이 프로그램을 알았을 때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언제 어느 시간부터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쩌다 보니 시간이 흐르고 어쩌다 보니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고 어른이 되었다.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면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 것처럼 어쩌다 보니 연구원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언제 어느 시점에서 명확하게 ‘나는 연구원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은 동기들이 조금씩 퇴적되어 현재는 연구원으로서의 삶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원으로서 겹겹이 쌓인 나이테를 돌아보고자 한다.
요즘은 초등학생들의 장래희망 중에 공무원, 가수, 유튜버가 많이 나온다는데, 내 시절에는 대통령, 축구선수 아니면 과학자가 대다수였다. 나도 물론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 시절 막연했던 장래희망을 뺀다면, 연구원 혹은 과학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 과학의 날 행사로 생각된다. 교외 활동으로 물리반 활동을 했을 때 과학의 날 행사로 전자기 유도를 이용하여 자동으로 움직이는 인형을 만들어 전시를 했었다. 입시 공부로 바쁜 시절이었지만, 아무리 바빠도 그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여러 시행착오 끝에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 때의 쾌감은 시간이 많이 지나 흐릿해졌지만 마음에 아직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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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학창시절 사진 (과학의 날 행사 준비) 

연구의 시작
학부시절부터 생물 관련 연구에 관심이 많았지만, 구체적인 연구분야에 대해서는 막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진단 관련 기술의 필요성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고, 관련 분야의 연구실을 찾던 중 지도교수님의 실험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학부 4학년 1학기 지금의 지도교수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서울에서만 생활하던 내가 다른 지역에 가서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연구실에서 나는 처음으로 전기화학적인 분석 방법을 이용하여 생체 물질이나 화학 물질을 검출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전기화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이 많이 부족했던 터라 여러 실험을 진행하였지만 결과를 분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전기화학에 대한 기초를 닦는 데 집중하였다. 교내 다른 과에서 개설되는 전기화학에 대한 여러 수업을 듣기도 하고 내가 접할 수 있는 통로를 통해 늦은 저녁 기숙사에서 매일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왜 cyclic voltammetry의 신호가 저렇게 나오는지, impedance 신호 분석은 왜 저렇게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전자의 kinetics와 물질의 이동 그리고 전기 이중층에 대한 이해가 쌓이면서 내가 실험한 결과를 분석할 수 있었고 연구에 대한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전기화학 기반의 바이오 센싱 연구 외 다양한 연구를 학위과정 동안 수행하였고, 학위과정 말기에는 휴대용 자가혈당측정기를 이용한 다양한 생체 물질 분석 연구를 수행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위 연구를 진행하게 된 동기도 흥미로웠던 것 같다. 바이오센서 분야의 대가인 Turner 교수의 강연을 학회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강연에서 가장 성공한 바이오센서는 혈당측정기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 우연히 카페 옆자리에서 한 어르신이 혈당측정기를 사용하고 계셨는데, 그 때 ‘혈당측정기를 당뿐만 아니라 다른 물질을 분석하는 tool로 사용할 수 있다면 현장진단이 널리 보급될 수 있게다’는 생각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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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카이스트 박현규 교수님 홈커밍데이


바로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혈당측정기를 다른 생체 물질 분석에 사용한 연구가 기존에 있는지 검색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람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내가 생각했던 것과 유사한 연구 내용이 몇 년 전 유명한 저널에 실려 있었고, 관련된 후속 연구들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순간 아쉬웠지만, 이 기술을 기반으로 상용화된 제품이 개발되어 있는지 알아봤는데 검색되지 않았다. 기존 연구 내용을 자세히 보니 간편한 혈당측정기로 다양한 생체 물질을 분석할 수 있지만 분리/정제 과정이 필요하여 결국 일반인이 쉽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혈당측정기를 활용하여 정제 과정 없이 그리고 labeling된 프로브 없이 누구나 간편하게 검출할 수 있는 기술에 대한 구상을 시작하였다. 혈당측정기를 분석모듈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검출 메커니즘을 통해 포도당의 농도 변화가 유도되어야 했고, 때문에 포도당과 관련된 모든 효소에 대해 조사하였다. 조사한 효소 중 hexokinase가 ATP의 인산기를 glucose로 전달하여 glucose-6-phosphate가 생성되고, ATP는 ADP로 전환되는 반응을 유도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substrate로 사용되는 ATP가 계속 공급된다면 glucose의 농도가 크게 변할 것이라고 생각되어 조사하던 중 pyruvate kinase가 ADP를 ATP로 전환시켜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hexokinase 효소만 사용하였을 때보다 hexokinase와 pyruvate kinase 조합의 연쇄반응을 사용하였을 때의 glucose 농도가 훨씬 더 크게 변하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 내용을 기반으로 ATP 검출 기술에 대한 연구를 완료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과 선배님들의 도움으로 위 기술뿐만 아니라 학위과정 중 DNA 기반 나노클러스터와 등온 핵산 증폭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과정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학위를 마치고 기업 연구소에서 전기화학 방식의 유전자 검출을 위한 전극 제작 공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학위과정 중 전기화학 실험을 위해 사용했던 전극은 주문제작하여 사용하였는데, 기업 연구소에서는 내가 사용하는 모든 전극을 직접 제작하였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던 클린룸에 들어가서 증착을 하고 lithography로 패턴을 만들어 전극을 제작하였다. 주문제작하여 사용했을 때는 몰랐는데, 전극 공정에 따라 똑같이 생긴 전극의 성능 차이가 크게 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전기화학 바이오센서에 대해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경험이었다.​

 

버스기사 이야기
장하준 저자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이야기’책의 내용 중, 인도와 스웨덴의 버스 운전기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같은 버스 기사이지만 스웨덴 버스 기사의 임금이 인도 버스 기사보다 50배가 높다고 한다. 그런데 인도의 도로환경을 고려할 때 오히려 인도의 버스 기사의 운전 솜씨가 더 뛰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여러 이야기 중 이 부분이 나에게는 인상 깊었다.
어떤 분야에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혹은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해도, 내가 속한 사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만났던 사람들, 내가 공부했던 학교, 내가 연구했던 연구실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한순간만 본다면 그 의미가 뚜렷하지 않지만 순간과 순간이 연결된 고리들을 멀리서 본다면 그것이 당시 좋았던 일이든 힘들었던 일이든 다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길 위에서
현재 나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서의 시작점에 서있다. 입사 전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부족한 것이 많지만 선배 연구원님들의 도움으로 한발 한발 걸어 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내가 하던 진단 연구뿐만 아니라 연구의 스펙트럼을 넓혀 치료제, 백신 생산 공정 기술에 대한 연구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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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선배 박사님들과


어쩌다 보니, 나는 연구원이 되었다. 부정적인 말은 아니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 동기들이 생겨났고, 나름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였고, 또한 감사하게도 내가 연구원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나에게 주어졌다.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싶지는 않다. 세상이 나에게 허락해 준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연구라는 긴 레이스에서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연구원으로 성장하고 싶다.
처음에는 어떤 내용으로 에세이를 써야 하나 고민이 있었는데, 쓰다 보니 별로 재미없고 긴 글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시간이 지나 이 글을 내가 다시 보게 된다면 부끄럽겠지만 초심을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긴 글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