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 스트레스에서 살아남기
Date 2021-04-23 15:52:09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641
조현열
교수
국민대학교 바이오발효융합학과
chohy@kookmin.ac.kr

 흔히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 한다. 아무리 좋아하고 즐기던 일들도 취미 활동을 벗어나 직업으로 다가오게 되면 스트레스가 된다고 하니 현대인들은 질병의 원인을 항상 품고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법하다. 연구자들 역시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은 마찬가지이다. 학부 연구생으로 시작한 연구자로서의 경험을 대학원생, 박사후 연구원을 거쳐 교수에 이른 지금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그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스트레스는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었다.

 대학원생들의 경우 가족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고 비슷한 환경에 노출된 실험실의 특성상 연구실 구성원들 간 오해나 갈등이 있을 때 오는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고 한다. 나는 다행히 좋은 연구실 동료들을 만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지만, 다양한 제안서 및 보고서 작성들로 연구 스킬보다 워드프로세서 스킬이 빠르게 늘어가는 중에도 실험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마음 한쪽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학원생으로서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우리 실험실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시도했었다. 운동, 게임, 술자리 등 여러 방법이 나름의 효과를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활동들의 공통점은 여럿이 함께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본인 속마음을 꺼내 보이기 수줍어하는 우리들의 특성상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줄 매개체가 필요했고, 그렇게 우리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통해 대학원의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홀로 시작한 박사후 연구원 생활은 새로운 포지션 및 환경들이 제공해준 동기부여와 함께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연구자로서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그 결과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박사급 연구원’의 무게감은 대학원생 시절과는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호기롭게 목표로 삼았던 2년 후 귀국 계획은 예상과 다르게 나오는 결과들로 인해 기한 없이 연기가 되어버렸다. 3년 차 생활도 반년을 넘어가던 크리스마스 날 퇴근을 준비하던 중 문득 휴일도 없이 집-연구실-집-연구실을 반복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 처음으로 의구심이 들었다. 불완전한 실험 결과, 불안한 비정규직 생활을 청산하고 싶은 마음, 연애 문제 등 주변을 둘러싼 다양한 일들이 스트레스 요인으로 번갈아 찾아오면서 튼튼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정신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매너리즘에 빠져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고도원 작가의 ‘한 걸음 물러서는 것’ [1] 이라는 짧은 글을 보고 내 생활의 일부를 ‘연구 활동’이 아닌 다른 활동을 위해 사용해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활동이 연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조건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1. 저녁 시간에 할 수 있을 것, 2. 한국인이 가능한 적을 것, 3.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 이러한 조건들에 가장 부합하는 활동은 체육관에서 배울 수 있는 운동이었다. 실험실의 한 학생이 본인이 다니는 브라질리언 주짓수 (Brazilian Jiujitsu) 도장을 함께 가보는 것을 제안하였고, 그것이 연구 생활 일탈의 첫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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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고도원의 아침편지, 2016.3.21., http://m.godowon.com/last_letter/view.gdw?no=4538

 

 

 최근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주짓수는 유술(柔術)의 일본어 발음인 ‘쥬쥬츠(じゅうじゅつ)’를 로마자로 표기한 데에서 유래했다. 브라질리언 주짓수는 무규칙 격투기가 성행하던 20세기 초중반 유도가 브라질로 전파되면서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루게 됐다. 유도가 주로 업어치기나 메치기로 상대방의 어깨 또는 등이 매트에 닿게 하는 것을 승부의 기준으로 삼는 데 비해, 주짓수는 실전 격투의 성격이 강하여 유리한 포지션을 선점하여 꺾기와 조르기 등의 기술로 상대방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으로 승부를 결정하는 특징이 있어 힘의 열세를 기술로 극복 가능한 몇 안 되는 무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주짓수 도장에 처음 방문하여 본 광경은 어렸을 적 한국에서 수련했던 유도 도장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중학생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남녀 구분 없이 매트 위에서 땀 흘리며 함께 기술을 연습하는 모습은 문화 충격에 가까웠다. 시범 수업 후 든 첫 느낌은 ‘이거다!’였다. 당연히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고, 다양한 직업 및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인 목표를 위해 함께 수련하는 곳이었기에 내가 개인적으로 원했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특히 기술 연습이 끝나고 진행되는 롤링 (rolling) 시간에서는 수업시간에 배운 기술들을 실전처럼 활용하여 대련이 진행되었다. 파트너의 움직임을 따라가면서 방어 및 공격을 위한 다양한 수 싸움을 해야 했기에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은 도복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머릿속 한 가득 멘솔 향을 마신 것처럼 상쾌한 느낌도 들곤 했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들렀다가 학교에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다시 연구와 관련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운동 시간만큼은 완전히 연구에서 벗어났었기에 한발 물러섰다가 다시 접근하는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 결과 막혀있던 부분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나거나 다른 해결방법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생겨나 운동을 하면서 소모한 시간만큼 연구에 투자한 것보다 더 효율적인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잠을 자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때 뇌를 쉬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사람이 어떤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꿈에서도 관련된 주제가 나온다고 하니 잠을 자도 그 스트레스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잠을 자는 것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면, 아예 그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다른 일을 집중해서 하는 방법을 택해보는 것은 어떨까?

 미국 유학 시절, 지도교수님의 요청으로 대학원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실험을 잘하는 방법,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들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가장 중요한 것을 빠트렸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튼튼한 댐도 작은 틈을 내버려 두면 무너질 수 있듯이, 연구자들도 본인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찾아 정신건강을 잘 유지해야만 성공적인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가 종식되어 매트 위에서 다시 땀 흘릴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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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Princeton Brizilian Jiu-Jitsu 도장의 사범님들과 동료들 (상단), IBJJF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세계챔피언 5회의 마르셀로 가르시아와 함께 (하단 왼쪽), 뉴저지 대회 시합 출전 (하단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