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포인트
Date 2023-10-17 13:35:04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트위터로 보내기 hit 80
이창열
선임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나노센터
lcyeol8457a@kribb.re.kr

     BT인으로서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지난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관계자 여러분 및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임은경 박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부족한 글솜씨지만 솔직담백하게 내 지난날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터닝포인트 I : 평균 80점

     중학교 3학년 1학기까지 공부와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매일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PC게임에 심각한 수준으로 중독되어 온종일 컴퓨터만 붙잡고 살았다. 나에게 시험기간은 학원 야간자습을 핑계로 이것들을 더 늦게까지 할 수 있는 기간, 오후 일정이 없는 시험 당일은 더 일찍 이것들을 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다지 개의치도 않았지만, 당연히 시험 성적은 늘 좋지 않았다. 연구자로서 부끄럽지만, 과학점수는 늘 30점대로 참담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3학년 1학기 기말고사 수학 시험 이후 가채점 시간, 다소 웃픈, 내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장난끼가 많은 친구가 내 가채점 점수를 보고 놀렸고, 장난인 줄 알지만, 내가 봐도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분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날은 시험이 끝난 후, 처음으로 PC방이 아닌 집으로 향해, 다음날 시험과목을 진지하게 공부하였다. 감사하게도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높은 점수를 받았고, ‘나도 하면 되는구나’하는 자신감을 얻었다. 다음 학기 중간고사, 시험기간을 미리 계획하여 공부하였고, 처음으로 평균 80점이 넘는 점수를 받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점수,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이었고, 더 올라가고 싶게 만들었다. 다음 기말고사는 평균 90점을 넘었고, ‘나도 하면 되는구나’하는 의구심 섞인 자신감이 믿음으로 바뀌었다. 한편, 늦게 시작한 만큼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기에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러한 마음가짐 덕분인지,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매 시험 성적의 오르내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성실함을 유지할 수 있었고, 꾸준히 상승곡선을 그릴 수 있었다.

 

터닝포인트 II : 과탑

     한양대학교 응용화공생명공학부로 진학이 확정된 후, 기쁨도 잠시, ‘한평생 시골에서 자라온 내가 수도권의 학생들과 경쟁하여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학 졸업 후 원하는 곳에 취업할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이러한 걱정을 뒤로 하고, 대학 새내기 생활을 즐기다 보니 눈 깜짝할 새 한 학기가 지나갔다. 적어도 매 시험기간 전 2주는 시험공부에 집중한 결과, 중상위권의 나름 만족스러운 성적을 받았고, 앞선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어냈다는 생각에 안도하였다. 2학기에 들어서도 평소엔 대학 생활을 즐기고, 시험기간에는 시험공부에 집중하였다. 그런데, 믿을 수 없이 좋은 성적을 받았다.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때면 친구들이 장난삼아 “과탑하겠네”라고 놀리곤 했었는데, 그게 실제로 이루어졌다. 학과 150여 명 중 1등을 하였다. 이는 나의 마음가짐에 단순하지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매 시험 1등을 목표로 공부하였고, 입학 당시에는 생각지도 않았던 좋은 성적을 받아왔다. ‘내가 공부라는 것과 어느 정도 맞구나’라는 확신이 들며, 나의 진로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하였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더 깊이 할 수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다짐하였다. 단순히 책을 통해 접하던 것을 내가 직접 실험을 통해 경험하고, 검증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실제로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확립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정작 내가 어떤 연구에 관심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중, 3학년 2학기, ‘센서소재설계’라는 과목을 수강하였다. 교수님께서 실제 SCI 저널에 게재된 연구논문을 강의 자료로 강의를 해주셨는데, 각 논문의 표적물질 검출의 중요성, 센서소재 제작방법, 센서의 작동원리, 이 세 가지를 중심으로 논문 전반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특히, 각 논문의 저자가 특정 작동원리가 표적에 의해 특이적으로 작용하도록 센서소재를 디자인한 아이디어에 대해 깨닫게 될 때마다, ‘센서’ 분야에 대한 흥미가 커져갔고, 수업 주차가 중간을 넘어갈 쯤, ‘바이오센서’ 분야 연구실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터닝포인트 III : 첫 논문 게재

     학부 졸업 후, ‘핵산 및 나노 공학 기반 바이오센서 개발’ 연구를 하시는 KAIST 생명화학공학과의 박현규 교수님 연구실에서 석사학위를 시작하였다. 초기에, 연구분야 관련 논문을 읽으며, 분야 관련 기초지식 및 연구동향 전반을 파악하였고, PCR, 전기영동, 세포배양 등 분자생물학 기초실험을 익혔다. 학부 전공이 화학공학이다 보니, 바이오 관련 기초가 부족하여 애를 먹었고, 실험 자체도 처음이다 보니 실수가 잦았다. 그래도 좋은 사수를 만나 잘 이겨낼 수 있었다. 부족함과 잦은 실수에도 늘 격려해주었고, 연구 수행에 있어 어려움이 있을 때면 본인 일처럼 열린 마음으로 해결해주려 하였다. 또한, 연구실 생활에 있어 늘 솔선수범하였다. 이 모습을 닮으려 노력하다 보니 나 자체도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175b375c710602afdff733d8909c2edc_1697517204_0393.jpg
그림 1. 박사학위 지도교수님 및 연구실 동료분들과 

 

      이후, ‘식중독 유해인자 검출을 위한 실시간 등온핵산증폭기술 개발’을 주제로 한 연구과제에 참여하며, 프로젝트 계획 수립, 추진, 트러블슈팅, 실험 스킬 등 연구 수행과 관련된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경험을 축적하였고, 나의 연구 활동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개인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DNA 염기 손상을 복원하는 효소의 중요성에 대해 다룬 논문을 읽었고, 해당 효소의 활성이 암과 퇴행성 신경질환의 바이오마커 역할을 한다는 점을 눈여겨보았다. 개인 프로젝트로 해당 효소의 활성 검출을 위한 센서 개발을 계획하였고, ‘G-quadruplex’라고 하는 DNA 2차구조 내 형광염기유사체가 매우 강한 형광을 갖는다는 점에 착안해, 해당 효소 활성에 의해 이중가닥 DNA 구조의 센서가 G-quadruplex 구조로 변하는 센서를 설계하였다. 별도의 신호증폭 단계 및 형광물질 표지 없이 신속, 고감도로 효소 활성 검출이 가능한 센서를 개발함으로써, SCI 저널에 생애 첫 주저자 논문을 게재하였다. 첫 논문 게재라는 사실도 기뻤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험을 통해 구현하고, 교수님께 조언을 구하며 논문을 집필하고, 논문을 게재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이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처럼 몰입되며 재미있었고, 실제 결과물이 완성되었을 때, 성취감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이 성공의 경험이 나를 한 단계 더 성장시켰고, 연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더 많은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구현함으로써, 더 많은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고, 이를 통해, 앞서 느꼈던 성취감을 꾸준히 느끼고 싶었다. 이를 위해 연구에 더 정진하였고, 학위 기간 동안 ‘핵산 공학 기반 바이오센서 개발 연구’를 주제로 꽤 여러 편의 논문을 게재할 수 있었다.

     박사학위 취득 후, 연세대학교 나노의학연구단과 하버드 의과대학 이학호 교수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밟으며, ‘감염병 진단용 통합형 현장진단 플랫폼 개발’을 메인테마로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기간 동안, 뇌과학, 약물전달, 오가노이드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연구원 분들과 소통하며 시야를 확장할 수 있었고, 광학, 전기전자, 기계 공학에서부터 임상의학까지 다양한 전문가분들과의 협업을 통해 더 높은 부가가치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감사한 시간을 통해, 최근 한국생명공학연구원 바이오나노센터의 선임연구원으로 임용되어, 새내기 연구원으로서의 첫발을 막 내딛었다.

 

175b375c710602afdff733d8909c2edc_1697517296_4674.jpg
그림 2. 박사후연구원 지도교수님 및 연구실 동료분들과 

 

돌이켜보며

     어릴 적부터 대학교 입시를 준비하며 진로를 고민하는 순간까지도 과학, 연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구간을 지날 때마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는 기대하지 못했던 감사한 터닝포인트를 접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단순하고 두서없지만, 매 터닝포인트를 동기부여 삼아, 눈앞의 단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터닝포인트들이 밀접하게 이어져, 실험결과에 울고 웃는, 연구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되어 왔다.

     한편, 연구와 가까워져 갈수록 단기적인 연구성과 달성에 현혹돼 도전과는 멀어져가는 나를 마주하는 날들이 많아져 온 것 같다. ‘비록, 생산적이지 못할지라도, 더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배움으로써, 더 훌륭한 무언가를 해냈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를 자주 하곤 한다. 이 글을 쓰며, 다시 한 번 반성을 되새기고 고쳐나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고등학생 시절, 노력에 비해 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 때에도 아랑곳 않고 내가 해야 할 것에 묵묵히 집중했던 초심을 상기해야겠다. 좀 더딜지라도 보다 더 나은 연구자가 되기 위해,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가짐을 갖도록 스스로를 다잡아야겠다.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글솜씨가 없고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글을 쓰기 전엔 걱정이 앞섰지만, 이 글을 쓰며, 내 인생 전반을 돌아볼 수 있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었다. 글을 기고할 수 있게 제안해주신 임은경 박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물심양면 지원해 준 가족, 많은 가르침을 주신 학위 및 박사후연구원 지도교수님, 동고동락 했던 동료 연구원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도 각자의 연구 전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실 모든 연구원분들이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만나 가슴 뛰는 순간을 맞이하시길 바란다.